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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세미클래식·영화음악 — 피아노 한 대로 무엇이 남을까
목차 6
좋아하는 영화음악을 피아노 한 대로 옮겨 보면 결과가 크게 갈린다. 어떤 곡은 첫 소절만 쳐도 원곡이 떠오른다. 어떤 곡은 음을 다 짚었는데도 뭔가 빠진 느낌이다. 오케스트라가 떠난 자리에 악보만 남은 것 같다.
편곡과 연주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 전에 볼 것이 있다. 내가 좋아한 것이 멜로디였을까, 그 멜로디를 둘러싼 소리였을까.
음표만 피아노로 옮기는 일은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는 일과 조금 비슷하다. 인물 사진은 색을 빼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지만, 노을 사진은 색을 빼면 처음 받은 인상이 꽤 달라진다. 낮게 울리는 금관, 끝없이 이어지는 현악기, 전자음이 만든 공간감이 곡의 핵심이라면 그 곡은 노을 사진 쪽에 가깝고, 음표만 옮겨서는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뉴에이지·세미클래식·영화음악이라는 이름을 이 질문을 기준으로 다시 정리해 봤다. 장르의 정답을 가리려는 글은 아니다. 마음에 드는 피아노 악보를 고르려고 적어 둔 메모에 가깝다.
장르 이름은 어디까지 알려 줄까
서점 서가에 붙은 ‘에세이’ 표지판은 어느 쪽으로 가면 될지 알려 준다. 그 칸의 책이 어떤 문장으로 쓰였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않는다. 장르 이름도 비슷하다.
국내 음반이나 악보에서 “세미클래식”은 대체로 클래식 느낌이 나면서도 듣기 쉬운 기악곡을 묶는 이름으로 쓰인다. 영어에도 semiclassical이라는 말은 있다. 다만 뜻이 넓어서, 이 이름만 보고는 곡의 형식이나 편성을 알기 어렵다.1
뉴에이지는 휴식·명상용 음악이나 분위기 음악을 찾다 보면 자주 만나는 분류다. 피아노 독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시사이저, 기타, 여러 지역의 악기와 음악 어법도 들어온다.
영화음악은 기준부터 다르다. 어떤 소리를 내느냐보다, 어디에 쓰이느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재즈도 전자음악도 관현악도 영화음악이 될 수 있다.
| 이름 | 주로 무엇을 묶나 | 피아노 악보를 고를 때 볼 점 |
|---|---|---|
| 세미클래식 | 클래식의 느낌과 대중적 접근성 | 선율과 반주가 두 손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가 |
| 뉴에이지 | 휴식·분위기 음악을 묶는 유통 분류 | 원곡의 분위기를 만드는 악기와 연주 방식이 무엇인가 |
| 영화음악 | 영상을 위해 쓰였거나 영상에 사용된 음악 | 장면과 원래 편성을 떠나서도 곡의 매력이 남는가 |
세 칸은 서로 겹친다. 한 곡이 영화에 쓰이면서 뉴에이지로 분류될 수도 있다. 해외 사이트의 light classical, classical crossover, modern classical도 서로 겹치는 부분은 있지만 동의어는 아니다. 그래서 실제 악보를 찾을 때는 장르 이름보다 작곡가·곡명에 solo piano나 piano arrangement를 붙여 검색하는 편이 빠르다.
악기를 걷어내도 멜로디가 남는 영화음악
원곡에서 악기를 걷어내도 선율과 화성 진행(선율 아래에서 화음이 바뀌어 가는 흐름)이 또렷한 곡들이 있다. 이런 곡은 피아노로 옮길 때 붙잡을 뼈대가 분명하다. 콧노래로 몇 소절만 흥얼거려도 무슨 곡인지 알 수 있다면, 적어도 선율 쪽 뼈대는 튼튼한 셈이다.
다음은 그 뼈대에 주목해 살펴볼 만한 작품들이다. 표에 적은 특징은 해당 작품을 편곡할 때 볼 점일 뿐, 작곡가의 모든 곡에 붙이는 판정은 아니다.
| 작곡가 | 작품 예시 | 피아노에서 살릴 점 |
|---|---|---|
| 존 윌리엄스 | 〈쉰들러 리스트〉, 〈스타워즈〉 | 귀에 남는 주제 선율. 반주가 두꺼워져도 그 선율이 묻히지 않아야 한다 |
| 엔니오 모리코네 | 〈시네마 천국〉, 〈미션〉 | 긴 호흡의 선율. 음을 많이 채우기보다 프레이즈의 정점과 쉼을 살리는 편이 효과적이다 |
| 다리오 마리아넬리 | 〈오만과 편견〉 | 피아노와 관현악의 역할. 곡마다 독주 부분과 다른 악기의 선율을 구분해 봐야 한다 |
| 히사이시 조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선율을 받치는 반복 반주와 리듬. 오른손 멜로디만큼 왼손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
〈오만과 편견〉은 피아노가 눈에 띄다 보니 음반 전체를 피아노 독주곡집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원 사운드트랙에는 장 이브 티보데의 피아노와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함께 들어 있다.2
그래서 악보를 고를 때는 대표곡 Dawn 같은 개별 트랙의 편성을 확인해야 한다. 음반 전체의 연주자 목록은 학교의 교사 명단과 비슷하다. 명단에 이름이 있다고 그 선생님이 모든 반 수업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른 악기가 나오는 곡이라면, 그 악기가 맡던 선율을 두 손에 어떻게 나눠 놓았는지가 편곡을 비교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
음만 옮기면 허전해지는 영화음악
반대쪽 끝에는 선율뿐 아니라 리듬, 음색, 여러 소리가 겹치는 방식이 곡의 인상을 만드는 음악이 있다.
한스 짐머의 〈인셉션〉·〈다크 나이트〉·〈듄〉에서 이런 순간을 자주 만난다. 낮은 소리의 압력, 전자음의 변화, 타악기가 쌓는 긴장감은 피아노로 같은 음을 친다고 그대로 옮겨지지 않는다.
피아노는 건반을 친 뒤 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관악기처럼 한 음을 붙잡고 점점 크게 불 수도 없고, 신시사이저의 음색을 그대로 낼 수도 없다. 그래서 편곡에서는 그 차이를 다른 수단으로 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악기가 한 화음을 몇 마디 동안 길게 끄는 자리라면, 피아노에서는 그 화음의 음들을 하나씩 짚으며 되풀이해 칠 수 있다. 앞 음이 사그라들기 전에 다음 음이 이어받으니, 화음이 끊기지 않고 계속 울리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짧은 음의 무늬를 반복 음형이라고 한다. 넓은 음역과 강약으로 공간감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소리의 질감이 중심인 곡이라고 피아노 편곡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도입에서 든 흑백 사진 비유는 음표만 옮기는 경우의 이야기다. 피아노는 색을 빼기만 하는 필터가 아니라 자기 색을 지닌 악기다. 그래서 원곡의 소리를 얼마나 복제했느냐보다, 피아노에서 통하는 표현을 얼마나 잘 찾았느냐가 중요해진다. 극장을 가득 채우던 곡을 거실에서 속삭이듯 들려주는 것도 편곡의 재미다.
짐머의 음악 가운데에도 Day One, Cornfield Chase처럼 반복 음형과 선율을 붙잡고 옮겨 볼 만한 곡이 있다. 결국 작곡가보다 곡을, 곡 이름보다 실제 편곡을 봐야 한다.
한 서가에 다 꽂히지 않는 작곡가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반은 어느 서가에 꽂아야 할까. 그는 영화음악과 전자음악, 피아노 음악을 두루 다뤘고, 〈마지막 황제〉로 데이비드 번·콩쑤와 아카데미 음악상을 공동 수상했다.3 피아노곡 몇 곡을 뉴에이지로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작업 전체가 그 한 칸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Aqua, Energy Flow를 악보로 볼 때는 선율 사이의 여백도 함께 살펴야 한다. 음이 드문 곳에서는 다음 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표현의 일부가 된다. 농담의 마지막 한마디 앞에서 들이는 뜸과 비슷하다. 서두르면 김이 빠지고, 너무 끌면 어색해진다. 그래서 “음표가 적다”와 “연주하기 쉽다”는 꽤 다른 말이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미국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았고, 사카모토처럼 피아노·앙상블·전자음향과 영화 작업을 오갔다.4 짧은 음형을 되풀이하며 조금씩 바꿔 가는 것은 미니멀리즘에서 자주 쓰는 방법이다. Nuvole Bianche, Una Mattina, Experience처럼 익숙한 곡도 반복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같은 음형을 반복할 때는 어느 성부(맨 위 선율, 안쪽 음, 베이스)를 더 들리게 할지, 어디서 강해지고 어디서 풀어질지, 페달을 언제 바꿔 밟을지 정해 보면 좋다. 손은 같은 일을 하는데 음악은 앞으로 가야 한다.
영화에 쓰인 곡과 영화를 위해 새로 쓴 곡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Una Mattina는 2004년 음반에 먼저 실렸고, 나중에 〈언터처블: 1%의 우정〉에 쓰였다.4 또 애초에 피아노 독주로 쓴 곡이라면, 다른 편성을 줄인 “편곡판”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책으로 치면 원서와 번역서의 차이다. 편곡판에는 원곡 위에 옮긴 사람의 선택이 한 겹 더 얹혀 있다.
이루마와 조지 윈스턴도 장르 이름보다 음악 자체로 만나는 편이 낫다. 이루마의 공식 소개에는 클래식·현대음악 교육과 서정적인 선율이 함께 나온다.5 조지 윈스턴은 자신의 선율 중심 독주 스타일을 포크 피아노라고 불렀고, 그 스타일에서는 피아노의 길게 남는 울림이 중요하다고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6 같은 “뉴에이지 피아노” 검색 결과에서 만났더라도, 두 사람이 소리를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악보를 고를 때 확인할 여섯 가지
내가 먼저 던질 질문은 하나다.
이 곡에서 꼭 남았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
멜로디일 수도, 왼손의 리듬일 수도, 소리가 커지는 순간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왼손 리듬에 끌려 고른 곡인데 편곡에서 그 리듬이 길게 누르는 화음 몇 개로 바뀌었다면, 멜로디가 아무리 충실해도 아쉬울 것이다.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정한 뒤 아래 항목을 살피면 편곡의 장단점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 볼 점 | 직접 확인할 방법 |
|---|---|
| 선율 | 반주와 함께 쳐도 멜로디가 들리는가. 중요한 음이 두꺼운 화음 속에 묻히지는 않는가 |
| 화성과 베이스 | 저음과 주요 화음만 쳐 봐도 원곡의 흐름이 느껴지는가 |
| 음색의 빈자리 | 원곡에서 좋아한 소리가 빠졌다면, 반복 음형·음역·강약으로 그 자리를 채웠는가 |
| 두 손의 동선 | 큰 도약이나 손의 겹침 때문에 선율이 자꾸 끊기지 않는가 |
| 페달 | 필요한 울림을 이어 가면서도 화음이 바뀔 때 소리가 뭉개지지 않는가 |
| 반복의 변화 | 반복할 때 음역·강약·성부 중 무엇이 달라지는가. 변화가 적다면 그 정적이 곡에 어울리는가 |
페달 없이 깔끔하게 들리는 곡만 좋은 것은 아니다. 페달의 공명 자체가 작품의 일부일 수 있다. 반복이 많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 반복을 계속 듣고 싶은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미리듣기가 있다면 가장 화려한 대목만 듣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어떻게 옮겨졌는지도 들어 보면 좋다. 가능하면 몇 마디라도 직접 쳐 본다. 원곡의 음이 많이 들어간 악보보다, 남긴 음들이 잘 들리는 악보가 더 만족스러울 때가 있다.
장르 이름은 곡을 찾을 때 표지판으로 쓰고, 악보를 고를 때는 귀와 두 손으로 확인한다. 피아노 한 대가 원곡의 모든 소리를 내지는 못해도, 그 곡을 좋아할 새로운 이유는 만들어 줄 수 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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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ins English Dictionary, “semiclassical”은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의 양식, 또는 클래식에 가까우면서 덜 복잡하고 쉽게 다가오는 음악 등의 뜻을 싣는다. 특정 작법 하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
-
Deutsche Grammophon의 〈Pride & Prejudice〉 20주년 음반 소개는 장 이브 티보데와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명시한다. 이 연주자 정보는 음반 전체의 크레디트이므로, 개별 트랙의 편성은 따로 확인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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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1988년 시상식 기록에 〈마지막 황제〉의 음악상 수상자로 류이치 사카모토·데이비드 번·콩쑤가 함께 올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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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나우디 공식 약력은 미국 미니멀리즘과의 만남, 다양한 편성의 작업, 2004년 음반 〈Una Mattina〉를 설명한다. Decca의 공식 피아노 악보집 소개에는 Una Mattina가 〈언터처블〉에 쓰였다고 나온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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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마 공식 영문 약력. 클래식·현대 작곡 교육과 선율 중심의 작품을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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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윈스턴 공식 문답. 자신의 피아노 스타일과 영향을 설명하고, “Folk Piano”라는 명칭을 쓴 이유를 밝힌다. ↩